2021년 1월 24일 주일저녁예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Notes
Transcript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
-본문 : 에스더 1장 1-22절
-제목 :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할렐루야! 주일밤 예배에 오신 모든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후좌우에 성도들과 함께 인사나누겠습니다. “힘내세요!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함께 인사나누겠습니다.
룻기 말씀을 마치고 에스더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룻기랑 에스더의 말씀은 몇 가지 닮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 66권 중 여성의 이름으로 된 성경입니다. 두번째는 시대적인 배경은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잘 나타나는 말씀들 입니다.
지난 룻기 전체 말씀을 짧게 요약하면 룻기는 사사시대의 영적 암흑기를 보여줍니다. 왕이 없어서 각자의 옳은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왕이 없어서 타락한 본성대로 죄를 반복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룻을 통하여 다윗왕을 준비시켰습니다.
반복되는 우연한 일들을 주관해 가시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줬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에스더 역시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에스더 말씀은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더 1장 전체를 교독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스더 1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몇 번 나왔습니까? 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총 10장으로 구성되는데 에스더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에스더가 성경목록에 과연 합당한 지 논란이 있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차라리 에스더서가 없었으면 좋을 뻔 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에스더서를 잘 묵상해보면 놀라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감추인 에스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섭리는 오히려 더 진하게 드러납니다. 에스더서는 타국에서 생존을 위협받은 유대인이 어떻게 하여 그 위기를 모면했는지 회고하는 책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유대인의 명절에는 부림절이란 절기가 있습니다.
“푸림”이라고 하는데 “제비뽑다”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볼 내용인데 에스더 3장에 보면 유대인의 원수 하만이 유대사람들을 말살하려고 그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유대인을 죽이기 위해 제비뽑았던 그 날에 오히려 하만과 유대인의 대적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매년 이 부림절 기념하고 아주 성대하게 지킵니다. 부림절을 지킬 때 지켜야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첫번째 규칙은 에스더서 전체를 낭독합니다. 부림절이 구원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에스더서를 소리내어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그 날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부림절 절기를 지켜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이 되지 않아도 에스더서를 읽을 때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에스더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섭리라는 말이 영어로는 providence 라고 합니다. 원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라틴어로는 pro video 라고합니다. 프로는 “-앞에” 라는 뜻이고 비데오는 비디오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합쳐보면 “미리 본다”라는 뜻입니다. 즉, 섭리는 하나님이 미리보시고 일하신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래서 섭리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쓸 수가 없습니다. 한치앞도 미리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보시면서 그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좋을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감사의 찬송이 나옵니다.
왜냐면 우리의 하나님은 이 모든 만사를 미리 하시고 또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위기의 순간에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유대민족이 멸절될 위기 순간에도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이 일은”이라고 시작합니다. 이 일이란 타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던 유대인들이 생존을 위협받았던 바로 그 일을 회고하면서 에스더가 시작됩니다. 배경적인 내용들이 나오는데 먼저 주목할 것은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은 바사 그러니깐 페르시아 제국의 네 번째 왕입니다. 페르시아는 현재 이란 나라입니다. 성경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섯 번째 왕까지 소개가 되는데 그 중에 4명의 이름이 성경에 나옵니다.
순서대로 보면 고레스-캠비세스-다리오-아하수에로-아닥사스다 입니다.
먼저 고레스왕입니다. 고레스는 B.C. 539년에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사람입니다. 또한 고레스 왕은 에스라 1장부터 3장에보면 칙령을 내려서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포로귀한을 허락한 왕입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고레스의 아들 캠비세스왕입니다. 캠비세스는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업적을 보면 애굽 지역 그러니깐 이집트 전역을 정복한 왕입니다.
세번째는 캠비세스의 아들 다리오 왕입니다. 보통 다리우스 1세라고도 합니다. 에스라 5장과 6장 말씀을 보면 이 다리오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해줍니다. 또 대단한게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탈취한 것들 다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다리오왕의 업적을 보면 그는 고대 페르시아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킨 왕입니다. 다리오는 인도부터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이제 남은건 그리스였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때에 1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리스 아테네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그게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였습니다. 질 것 같았던 절망적인 전쟁에서 그리스가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까지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었던 거리가 약 40km였고 이것이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게는 치욕적인 일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이란은 자국에서 마라톤 경기를 열지 않습니다.
다리오왕은 다시 한 번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리오왕의 아들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 제국 4번째 왕으로 등극 합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표현이고 보통 헬라식 표현을 많이 쓰는데 크세르크세스라고 합니다.
영화 300에서 나는 관대하다 라고 외치던 그 빡빡이가 바로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 아닥사스다 왕인데 에스라 7장부터보면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으로 2차, 3차 포로귀한을 하게 됩니다. 2차포로 귀한은 에스라를 통해서 3차는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자면 에스더 1장 1절을 다시 보시길바랍니다. “이 일을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의 일이 바로 에스더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기간은 약 10년정도인데 그 사이에 유대민족이 멸절할뻔했고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해서 유대민족을 구원했다는 것이 에스더의 중심내용입니다.
에스더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8절까지는 아하수에로 왕이 자신의 부와 권세를 과시합니다. 둘째는 9-12절부터 보면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는 왕후 와스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결말인데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즉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납니다.
먼저 첫 부분 아하수에로 왕의 부와 권세를 살펴봅시다. 1절부터 8절까지 보게 되면 막대한 부와 권세를 가진 아하수에로 왕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없어도 될 내용 같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에스더의 저자는 이것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이유는 이 부분이 풍자적인 의미를 가지지 때문입니다.
에스더라는 여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포로로 잡힌 유대민족 전체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에스더라는 여인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에 비교하면 감히 비교할 대상도 되지 못합니다. 마치 예전에 수저논쟁이 있었습니다. 누구는 금수저니 은수저니, 혹은 흙수저라는 말이 있었죠.
에스더가 흙수저입니다. 포로로 잡힌 유대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녀는 고아입니다. 부모도 없이 사촌오빠 모르드개의 손에서 길러졌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고아로, 여성으로 지내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에 반해서 아하수에로는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아들입니다. 그의 선조 고레스왕은 바벨론을 물리치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캠비세스는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또한 아하수에로의 아버지 다리오는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페르시아를 번영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하수에로 왕이 물려받았습니다. 에스더는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인데 그가 자신의 부와 권세를 과시합니다. 잔치를 벌이는데 그 기간이 무려 180일입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다스리는 영토가 너무 넓어서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이어가는데 한 날에 다 치를 수가 없어서 잔치가 계속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180일이나 걸릴만큼 모든 페르시아의 vip를 초대해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합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거하는 수산궁에서 그 지역 모든 사람에게도 칠 일간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가 얼마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본문 6-7절을 보겠습니다.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잔치를 벌이는 공간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바닥은 값비싼 재료 깔고 대리석 기둥에 비싼 천을 달아서 화려함을 더합니다. 심지어 테이블과 의자가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잔치에 갔다가 나오면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서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마시는 잔은 금 잔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보면 7절에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금 잔도 그냥 똑같이 찍어낸 것이 아니라 각기 모양이 다르다고 합니다. 다 수공예품입니다. 진시황 무덤 근처에 병마용이라고 있습니다.
그 굴 속에 보면 흙으로 구워만든 병사와 전차 말 등이 있는데 병사의 수가 약 8,000명 입니다. 근데 그 병사들의 얼굴을 보면 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중국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잔치에 쓰는 그릇 한 개조차도 최고의 것으로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런한 과시하는 삶에는 자꾸 공허함이 생깁니다. 더 자랑할게 없을까? 그러다가 일이 생깁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술에 취해서 더 자랑거리가 없나 살펴보다가 왕후 와스디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잘 차려입고 잔치상에 나와라 명령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왕이 술에 취해 와스디를 불렀느나 와스디는 이를 거절합니다. 만약에 와스디가 아하수에로의 말에 순종하여 나왔더라면 에스더 이야기는 왕궁에서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왕후 와스디가 교만해서인지, 아니면 아하수에로 왕의 요구가 너무나 불쾌한 요구인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그 결과는 자신의 신하들과 모의하여 왕후 와스디를 폐위 시켜버립니다. 왕후도 한 순간에 분노에 휩싸여 폐위시는 아하수에로 왕을 보면서 세계를 제패한 제국의 왕도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국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한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술취함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법령을 만들어서라도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쪼짠한 사람이 바로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에스더 1장은 바로 이것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대 제국의 왕도 별거 없다. 오히려 연약한 에스더 한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제국의 권세를 뛰어넘은 역사를 보여 준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기가 역사의 주권자인줄 알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 같은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잠언 21장 1절 말씀을 보면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마치 봇물과 같다고 하는데 예전 개역한글성경을 보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라고 나옵니다. 보의 물이라는 것이 강, 시내, 운하 등을 의미합니다. 마치 저수지나 시내 , 운하의 물이 관리하는 자의 계획대로 흐른다는 겁니다. 즉, 왕의 마음도 결국엔 하나님 손에 달려있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은 애굽의 열가지 재앙을 내실 때마다 종종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애굽의 모든 우상들을 부수실 계획을 하시고 일하셨기 때문에 10가지 재앙이 다 임할 때까지 자꾸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에스더 1장으로 돌아가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치만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에스더를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유대 민족을 구원할 계획을 미리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 겁니다.
에스더 1장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심의 핵심 입니다. 왕후의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를 에스더가 준비되어 오를 수 있도록 또한 일하실 겁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군왕들과 다릅니다.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며 택한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환란 날에 버려두지 않고 시험 당할 때에 외면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봅시다.
여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면서 위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당장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하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광주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릴 위해 일하심을 신뢰하는 복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